해릉양왕(海陵煬王)
금(金)나라의 네번째 황제인데 죽은 뒤 폐서인되었다. 그래서 책에는 해릉왕이라고 나와 있거나
뒤에 받은 시호 양(煬) - 참고로 이건 아주 안 좋은 시호다. 황음무도하고 예법을 모르는 자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수양제(113만 대군을 끌고 고구려를 침공한 황제)의 양 자도 이 양 자다 -
을 붙여 해릉양왕이라 칭한다. 이름은 완안적고내, 중국식으로는 완안양이라 불린다.
해릉왕이 번왕이었을 때 당시 금나라 황제 희종(해릉왕의 사촌 형이 된다)은 해릉왕의 착실한
성품을 높게 사서 그를 자주 불러 이야기를 같이 나눴으며, 금태조의 창업의 어려움을 희종이 말할 때
해릉왕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희종은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국정에 임하였지만 재위 10년이 넘어가면서 차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며 무고한 대신을 함부로 죽이기도 하였다. 이런 그에게 실망한 신하들은 해릉왕과 함께 역모를
논의하게 되었다.
1149년 그들은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켰다. 희종은 황급히 동생을 찾았지만 나타난건 손에 칼을 들고
들어온 해릉왕이었다. 역모가 성공하고 제위에 오른 해릉왕은 희종의 일족(자손이 많아 다 합치면 70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짐)을 모두 죽여 희종은 제사가 끊기게 되었다. 하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
후환을 끊기 위해 전임자의 혈족을 다 없애는 것은 비단 이 일만 아니고 동서양사에서 자주 보이니
해릉왕만이 잔혹하다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해릉왕은 제위에 오르고 나서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고대의 현군을 본받고 싶고, 경들의 직언을 듣고 싶다. 조정이 잘못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간언해 주길 바란다."
또한 병영을 순시하였는데 병사가 흙이 섞인 밥을 먹고 있자 자신이 그걸 빼앗아 먹고 더 좋은
밥을 주도록 하였다. 순행길에 마차가 넘어져 사람이 깔린 것을 보자 자신의 친위대에게 마차를
들어올려 사람을 구해 주도록 시켰다.
여기까지만 보면 성군이 될 자격이 충분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건 훼이크였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색마였고,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위아래를 가리지 않았다. 친척도 그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엄연히 남편이 있는 부인을 잡아다 범하는 일도 서슴없이 했다. 신하들이 이를
크게 걱정하고 간언하였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해릉왕은 거위 고기를 좋아했는데, 순행 나가서도 짐짓 산해진미를 물리치고 '짐에게는 거위 고기면
충분하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시도 때도 없이 거위고기를 찾는다는게 문제였다.
나중에는 거위 가격이 크게 올라 신하들이 황제에게 바칠 거위를 구하기 위해 소 한마리를 끌고 가서
거위 한 마리와 바꿔 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1153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도를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 옮겼다. 이 때 반대한 신하들은
대부분 한 칼에 목이 달아났다. 그리고 해릉왕은 본인이 제위에 오를 때부터 밝혔던 남송 정복을 위해
50여만명의 장정을 강제 동원하고 배를 건조하도록 지시했다. 국고는 이미 파탄이 났고, 가족이
서로 떨어지거나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이를 원망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킬 정도였다.
당시 남송과는 화평조약이 맺어져 있었지만 남송은 이전에 북방 민족들에게 당한 쓰라린 역사가
있어 강남으로 후퇴한 뒤에도 항상 전선을 건조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금의 신하들도 이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여러 신하들이 남송 침공을 반대했지만 해릉왕은 그들을
모두 목 베는걸로 여론을 탄압했다(심지어 태후 - 황제의 어머니 - 마저도 전쟁을 하지 말라고
간언하자 어머니까지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남송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금의 선박 기술은 남송에 뒤떨어졌고 번번히
수전에서 물 먹기 일쑤였다. 그러고도 남송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의 천막으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해릉왕은 깜짝 놀라 화살을 봤는데 그건 송나라 군사의
화살이 아니고 금나라 군사가 쓰는 화살이었다.
그렇게 부장이 일으킨 반란으로 1161년 비참한 죽음을 맞았고, 폐서인된 뒤 모래밭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었다. 물론 그의 일족(태자 등)도 모두 주살당했다.
금나라 백성들에게는 다행히도 제위를 이은 완안오록은 소요순시대를 열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의 명군이었다. 완안오록의 묘호는 바로 세종(世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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