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記號와 意味
한자의 記號와 意味
한자는 기호와 의미를 지닌 뜻의 문자이다.
한자는 글자이면서 언어라는 것이다.
언어는 언어학에서 보면 소쉬르가 말한 시니피에(의미)와 시니피앙(기호)의 양면을 지니고 있다.
한자를 공부 할 때 소리와 뜻, 즉 訓과 音을 공부하면서도 훈과 음을 같은 표현의 방법으로 여겨 훈음을 나타내는 글자라는 의식이 매우 깊다. 音은 한자의 소리요. 훈은 한자의 의미, 즉 메시지가 담겨 있는 언어이다. 이렇게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글자라는 생각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기고 있다. 이에 한자는 왜 글자가 그렇게 많은가?
왜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생기는가? 왜 그렇게 복잡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됨이그러하다.
한자는 단음절어이기 때문에 같은 하나의 한자가 말이다.
첫째의 질문에 답하자면 한자는 말이기 때문에 많다.
한글과 영어의 단어(언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도 한자는 대충 6만여 자라고 한다.
두 번째 답은 이렇다. 소리글자 영어나 한글 등은 글자가 여러개 합하여 의미적으로 공감이 되어야 언어로써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자도 하나의 자 속에 의미를 넣고자 다른 자와 조합하면서 복잡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답은 이렇다. 언어란 시대에 필요하면 자연 발생하는 것이다. 필요하지 않으면 사멸하는 것이 언어의 특징이다.
한자를 글자라고만 보지 말고 언어라는 측면에서 보아야 이해하는데 용이하다.
언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자는 모두 연계성을 가지고 만들어 졌다. 이 연계성을 이해하는 것이 文理를 얻는 것이다.
다음에 이어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와 실재계의 한자와 관계를 설명하겠다.
앞에서 이어 라캉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3가지라고 하여 이전의 쇼스르의 2개라는 의미에도전하였다. 想像界(the imagery) 象徵界(the symbolic) 實在界(the real)이다.
한자의 뜻에는 상징계와 실재계가 있다고 본다.
한자공부시에 訓音에서 訓은 상징계에 속한다.
視 見 觀 望 省 察 覽 등을 ‘본다’라고 한다. 여기서 이러한 여러개의 뜻을 ‘본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또 한자의 3요소 形, 音, 意에서 意는 실재계에 속한다.
상징적 표현인 세상의 ‘아버지’ 각각 다르듯이 앞의 ‘본다’라는 자는 언어적 의미로는 각각 다른 것이다. 이것 또한 한자를 글자로 보는 견해에서 생기는 의문인 같은 글자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 답을 하고 가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 상징계로는 같으나 실재계에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어의 장점이고 언어의 효율성이다. 모든 언어적 표현을 구분하다보면 그 숫자가 너무 많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한글에 ‘죽다’라는 말은 그 함축된 표현이 너무 많다. 이처럼 한자도 언어이기 때문에 類意적 표현이 많은 것이다.
다시 실재계에서의 유의자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것이다.
실재계란 자를 만들 때 구조에 들어간 자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意音이라 하지 않고 訓音이라 하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意란 글자마다 유심적 의미변화가 많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어 여기에 관계되는 望形生訓과 以形索意을 설명하겠다.
앞에서 어어 望形生訓과 以形索意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望이란 한자는 특별한 행위가 없이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의미이다.
古典에서는 以形索意라고 意를 義로 하고 있는 것은 당시에 意자가 만들어 지기 전에는 義자로 쓰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두 자가 병존하는 이유는 고전에 그렇게 사용한 자료를 그대로 불러다 쓰기 때문이다.
한자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래서 성부의 한자는 합자의 뜻을 갖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소리가 같으며 뜻이 가깝다고 하는 同音近意이다.
望形生訓에서 ‘본다’는 한자 중에 望은 가장 막연하게 본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望形은 한자의 ‘모형을 보고’라는 의미이며 訓은 訓音에서 말했듯, 訓이란 상징적 의미이다. 生訓은 암기한 한자의 훈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한자를 보면 그 구조를 살펴 그 뜻을 유추하여 내는 것이 아니라
한자만 보면 그 훈을 바로 생각한다는 말이 된다. 이는 암기식 교육의 산물이며 기억력을 담당하는 좌 두뇌의 발달이다. 이러한 훈련은 한자는 한문공부를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한자는 한자만의 학문적 체계와 세상이 있다고 하는 견해를 이해하지 못함에서 온 것으로 본다.
우리는 과거 어린이는 어른의 축소물로 여겨 왔다. 그래서 어른을 본받고 어른의 시키는 대로, 어른의 비위에 맞으면 바람직한 어린이로 여겨왔던 의식과 비슷하다.
현대의 어린이관은 다르다. 어린이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한자도 그러하다. 한자에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한자에는 인간이 행동하여야 할 방법이 내재되어 있고, 한자의 구조가 그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는 한문을 공부하기 위한 알고리즘만이 아니다. 이것이 한자를 공부하면 이에 세상의 이치가 들어 있어 행동거지가 바람직해 진다는 결론이다. 이 때문에 한자(文字)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는 의미가 세워진다.
以形 索意에서 以形은 ‘ 한자의 모형에서’ 라는 것이며 索意은 ‘의미를 찾아낸다’이다.
意는 라캉의 실재계이다. 실재계는 내면에 남아있는 의미로 한자의 구조의 차이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한자의 구조를 살펴서 그 뜻을 찾아낸다는 말이다.
이러한 행동은 한자를 보고 구조에 따라 그 뜻이 이루어짐을 설명 한다는 것으로 입으로 쓰는 한자공부라고도 한다. 한자를 보고 正誤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손가락으로 써보는 행동은 훈음 외우고 쓰기를 수많이 해서 공부 했다는 의미이다. 한자의 구조를 들여다 보고 무슨 자에 무슨 자를 하여야 하는데 잘못이라는 판단 기준이 되어야 이것이 바로 한자가 가지는 의미 학습인 것이다. 이것이 창의력과 상상력과 논리력을 기르는 미래 지향적 학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 두뇌를 발달시키는 활동이다. 이것이 한자교육이 조기교육의 필요성이기도 하다. 이어서 한자의 실재계는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하겠다.
視 見 觀 望 省 察 覽 看의 ‘본다’에서 見은 사람의 눈을 그린 상형자이다.
분해한다면 目(눈목)+(어진사람인=人)으로 되어 사람의 눈의 기능을 표현함이다.
‘본다’의 일반 총칭이다. 단 여기서 본다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라고 하였으며 그 행동을 바르게 라고 하여 그 시사하는 바가 있다.
視은 見+示의 구조이다. 부수가 見으로 자의 의미의 대표가 되는 것이며 示는 한자의 소리인 聲符가 되고 부수(形符)를 설명하는 역할을 하여 보는 것(見볼견)을 보이(示)는 대로 보라는 의미 있다. 따지고 조사하는 것은 아니다. 어휘는 巡視이다.
觀은 見(볼견)+雚(황새관)으로 見을 부수로 하고 소리인 雚은 보는 것(見)을 어떻게 하라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황새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듯 매우 조심성 있게 자세히 그리고 오래도록 살핀다는 의미이다. 이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살핌으로 다음의 察과 비교된다. 어휘는 觀光이다.
察은 宀(집면)+齊(제사 제)로 宀(집면)을 부수로 하여 두 한자가 합하여 다른 뜻을 만든 회의 문자이다. 즉 제사지내려면 집안을 잘 살피라는 것이다. 여기서 살피는 것은 觀과 달리 잘 보이지 않는 裡面(속)을 의미한다. 즉 부정인 것이 없는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휘는 診察이 어울린다.
이렇듯 모든 유의자는 실재적 의미로는 같지 않다는 것이며 訓이 같다고 하여 다른 한자와 서로 교환하여 사용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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